글  성치호  건축사(건축사사무소 토루)     사진  국가기록원

 광화문 근처에서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필자는 광화문 광장에서 광화문과 경복궁, 그리고 그 뒤편으로 열려있는 북악산을 바라볼 때마다 과연 누군가 말한 천하제일의 명당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어린 시절 기억 저편의 중앙청[中央廳 ; 구(舊) 조선총독부 청사]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 건물이 자취를 감춘 지 벌써 20여 년이 흘렀다. 구 조선총독부 철거 논란이 있었을 당시에 필자는 건축사사무소 신입 직원이었는데 그때 선배들과 가졌던 열띤 찬반 토론이 생각났다. 그리고 당시에 가졌던 관점과 지금의 관점이 생각보다 많이 바뀌어 있음도 알게 되었는데 이는 새삼 새롭게 다가왔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싶어졌고 그 내용을 정리해 본다.

조선총독부 청사와 그 설립 배경

 조선총독부 청사는 일제강점기, 최고 행정기관으로서 조선총독부가 사용하였던 건축물이다. 강점기 초기에는 남산에 있던 일본 공사관을 사용하였는데 점차 비좁게 되자 넓은 청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1912년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게 데 라란데(George de Lalande)가 고전주의 양식을 차용하여 설계를 시작하였는데 설계를 진행하던 중에 급사(急死)하고 말았다. 그 뒤 대만총독부 건립 경험이 있던 노무라 이치로(野村一郞)가 청사 설계를 완성하였다. 1916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었고 1926년 준공되었다.

 식민지 도시의 건물들, 그중에서도 공공건물은 도시 공간에서 통치자와 통치자의 위치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 조선왕조의 권위를 상징하는 경복궁 일부를 해체하고 건립한 조선총독부 청사는 권력의 이동과 몰락한 조선왕조의 현실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건물이었다.

조선총독부 청사 개요

 조선총독부 청사는 지하 1층, 지상 4층 건물로 건축면적 약 7,000㎡, 연면적 약 31,750㎡로 구성되어있다. 구조는 철근콘크리트조, 기둥 사이의 벽은 벽돌로 쌓았으며 외부와 중정 내의 바깥벽의 징두리벽에는 화강석을 붙여 쌓았다. 나머지 벽은 인조석으로 마무리하였다. 건물에 사용된 화강석과 대리석은 국내에서 채석한 것을 사용하였다.

▲ 대만 총독부 청사
▲ 대만 총독부 청사
▲ 중국 장춘에 있는 만주국 국무원 청사
▲ 중국 장춘에 있는 만주국 국무원 청사
▲ 1972년 서울시청 시무식 당시 조선총독부 내부 모습
▲ 1972년 서울시청 시무식 당시 조선총독부 내부 모습

 

도시 건축 역사적 관점으로 본 조선총독부 청사

 현재도 광화문은 서울의 이미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장소 중 하나이다. 이러한 입지조건으로 인하여 조선총독부 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탄생과 함께 철거의 명분을 가지게 되었다. 해외에서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대만의 총독부 청사와 만주국 국무원 청사도 식민지 건축의 상징적인 형태로 건립되었고,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서울시청과 서울역사 등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장소의 상징성의 차이가 건축물의 존폐를 결정한 중요한 이유가 된 것 같다. 

 역사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건축이란 오랫동안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큰 특성을 가진 건축물이라 할 수 있는데 조선총독부 청사는 이러한 특성도 가지고 있었다. 건립 주체와 건립목적의 불순함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20년(조선총독부로써 사용된 기간; 1926년~1945년) 보다 많은 50여 년을 넘게 우리가 사용하였다. 제헌국회 개원, 대한민국 국호 결정, 초대 대통령 선출, 대한민국 정부 수립 행사, 초대~제7대 대통령 취임식 등이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대한민국의 탄생과 발전의 역사도 이 건물과 함께했다.

조선총독부 철거에 대한 논란

 이승만 초대 대통령부터 있었던 철거에 대한 논란은 1993년 김영삼 전(前) 대통령에 의해서 경복궁의 완전복원을 위한 이전, 보전으로 검토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이슈로 인해 철거 지시로 바뀌게 되면서 급격히 진행되자 한국사(史)학계를 대표로 하여 곳곳에서 철거에 대한 지지가 표출되었다. 광복회, 한글학회 등이 ‘구 조선총독부건물철거 촉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국민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많은 학교와 단체들이 이에 동참하여 성금을 보내며 지지하였다.

 1991년 서울 시민을 대상으로 문화부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65%가 철거와 이전을 지지하였고, 1993년 청와대에서 한 여론조사에서는 51.4%가 철거를 지지하였다. 한민족의 정기를 되찾고 겨레의 얼을 살리는 데 반대를 할 우리나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더욱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의 일환이었던 ‘일제강점기 잔재 청산’은 일제와 그 부산물에 대한 이분법적 접근을 부추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건축계에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는데 일부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대표적 시각은 식민사적(植民史的) 의미를 건축사적 의미에 포함시킨 것이었다. 비록 일제 식민지 시대에 건축되기는 했지만 당시의 건축양식과 기술도 한국 건축 역사의 변천 과정으로 이해하는 입장으로써 건립 당시 조선인 건축사들도 참여하였던 만큼 서구식 건축방법을 학습하는 과정, 즉 한국 건축의 역사의 일부로 보자는 의견이었다. 또 하나의 시각은 장소성(場所性)에 대한 것인데 당시에 이전(移轉)의 의견도 많이 거론되었다. 건물은 원래의 위치와 맺는 장소성이라는 성격이 있으므로, 멀리 이전할 경우 그 장소성이 훼손되므로 가까운 곳으로 이전하자는 의견과 건물은 이전하는 즉시 장소성을 잃게 되므로 무의미해진다는 의견이 있었다. 건축계 일부에서는 이 장소성을 최대한 보존해야 한다고 하였다.

 

철거의 진행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 3·1절 행사가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선포하는 기념식과 함께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국민 여론 대다수의 지지를 얻어 8월 15일 광복 50주년 광복절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총독부건물 첨탑을 분리하여 천안 독립기념관으로 이전된 것을 시작으로 1997년 2월 28일까지 약 4년 동안 철거가 진행되었고 70여 년의 건물로서의 삶을 마감하게 된다.

맺음말

 광복과 함께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되었다면 이러한 논란도 없었을 것이다. 광복 이후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는 불행히도 조선총독부 청사가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사정으로 볼 때 대안이 없었겠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 조선총독부 청사에 너무나도 많은 역사적 의미를 부여해 버렸다. 그리고 또 불행히도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와 함께 우리가 스스로 부여한 역사적 의미의 장소가 사라져 버린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판단하기에 우리는 아직 과거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듯하다. 건축계는 철거 논란 당시 주도적인 역할에 한계가 있었고 숙제로도 지적되었다. 현재는 어떠할까? 이러한 큰 이슈가 없을 뿐 바뀐 것이 많지 않은 것 같다. 내가 만난 건축사들은 똑똑하고, 타 분야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본 지식과 지식 습득능력이 대단히 뛰어난 집단이다. 건축계 외부에 대한 합리적인 관계 설정 및 적극적인 활동 등을 통해 건축사들의 위상 제고(提高)를 위해 여전히 분발이 필요한 시기라 생각된다.

 

 

글  성치호  건축사(건축사사무소 토루)     사진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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