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철 본지 편찬위원(토미건축사사무소)

  언제인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또렷이 기억하는 대화가 있다. 어느 외국인이 한국에선 직장인과 자영업자를 가릴 것 없이 구정(舊正)이 지나서야 비로소 한 해의 업무가 시작된다고 하면서, 연말부터 구정 사이 한 달여의 시간이 한국에서는 아무것도 결정되거나 실행되지 않고 어영부영 흘러가 버리는 시간이라고 푸념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어서 그는, 한국의 연말연시가 유독 길고 선진외국에 비하여 새해의 시작이 더디기 때문에 파트너로서 한국인과 함께 일하는 것에 불편함이 있다고 토로하였던 것도 기억한다.
  설득력 있는 말이다. 신정 새해는 지났지만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새해가 있으니 1월, 한 달은 사실 연말 같기도 하다. 묵은해를 정리하는 한 달 같기도 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공짜로 생긴 한 달 같기도 하다. 신정 때 금연 계획이 작심삼일로 끝나버렸다면 구정 새해에 다시 마음먹을 수 있고, 멋진 몸짱 만들기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면 또 다른 새해의 기회가 있으니 긴 연말과 두 번의 새해가 한국인에게는 특별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보면 참 인간적이고 푸근한 시간관념인 같기는 한데, 한 해의 시작을 신정에 ‘준비~땅!’하고 힘차게 출발하는 서양 문화에 비하여 한국은 구정이 되기 전까지는 도무지 움직이려고 하지 않으니 외국인 입장에서 답답할 수도 있겠다는 이해가 간다.

두 번의 새해가 있는 한국,
두 번째 출발선에 서 보지만 기운차지 않아.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맘 편히 먹고, 역량 키우는 기회로⋯

  불편, 답답, 이러쿵 저러쿵 해도 그 두 번째의 새해는 결국 오고야 말았다. 복이 많은 민족이라서일까, 다시금 새해의 출발선에 서 본다. 그러나 어둡다. 기운차지 않다. 애써 힘찬 듯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국내외 여건은 어수선하다. 전 세계 76개국이 선거로 지도자를 선출하는 해다. 역사상 전례 없는 ‘슈퍼 선거’의 해란다. 하나같이 대한민국의 환경에 영향을 끼치는 주요한 나라들이다. 이미 치러진 대만 총통 선거에 인도 총선, 우리나라 총선, 일본 집권당 총재 선거, 미국 대통령 선거 등으로 어수선한데, 경제 전망도 하나같이 잿빛이다. 눈여겨볼 것은 역사(歷史)다. 세상이 어수선 할 때, 역사에는 아비규환(阿鼻叫喚) 절점(節點)이 맺혔기 때문이다. 기대해 볼 것은 모든 사람이 전망하는 대로 세상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 어쩌면 암울한 전망을 뚫고 푸른 희망의 싹을 볼 지도 모른다.
  건축사(建築士)이면서 세상의 혼돈에 이렇게 간섭하는 것이 오지랖 넓은 일일 수도 있겠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새로 선출된 협회장에게 기대해보고 이어서 선출될 서울협회장에게 의지해보기로 하고,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맘 편히 먹고 각자의 역량을 키워보는 한 해를 살아보는 것도 좋겠다. 지난 연말 신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건축사들이 AI에게 도전을 받았으니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경제 통계를 보면, 사업은 성공 확률보다 실패 확률이 더 높다한다. 건축사사무소 운영도 사업인데 피해갈수는 없을 게다. 특히 올해 같은 때에는 조심스레 두드려 가며 한 해를 건너야 하겠다.
  2월의 새 해, 다시 한 번 심기일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그러니 서울특별시건축사회 모든 회원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새롭게 피는 꽃’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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